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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부산 아시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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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은 21세기 최초의 아시안 게임이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에 이은 대한민국의 세 번째 아시안 게임이다.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 부울경 3개 지역에서 분산 개최된 대회이다. 같은 해 여름에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치렀던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을 주경기장으로 하여 실시되었다.
2. 유치전[편집]
아시안 게임 역사상 최초로 경선이 벌어진 대회였다. 올림픽과 달리 경쟁이 덜했던[2] 아시안 게임 유치는 그동안 주로 단독 입후보를 통한 승인의 과정으로 진행됐다. 심지어 1970년과 1978년에는 당초 개최국이었던 대한민국과 싱가포르가 마지막 순간에 개최를 포기하며 발을 빼는 통에 태국이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1978 방콕 아시안 게임으로 무려 두 차례의 소방수 역할을 하는 촌극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2002년 대회는 21세기의 첫 대회라는 큰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올림픽처럼 경쟁이 벌어졌다.
부산광역시에 맞선 경쟁 도시는 대만의 가오슝이었다. 대만이 처해 있는 외교적인 고립을 국제 스포츠 행사 개최로 만회하려는 대만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치전에 나섰다. 가오슝의 공약은 1,000만 달러의 발전기금 OCA 기부 및 선수단 전원의 무료 숙박이었고 이를 리덩후이 당시 중화민국 총통이 직접 나서서 보증을 하여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에 당황한 부산이 내걸은 공약은 1,200만 달러의 발전기금 제공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아시안 게임에 걸리는 무수한 선심성 원조 및 발전기금 제공은 일종의 전통이 되어버려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3]
한편 부산 아시안 게임의 유치를 도운 진짜 1등공신은 바로 중국이었다. 양안관계로 대표되는 중국과 대만은 한국과 북한처럼 본래 같은 나라지만 이념으로 분단된 경우에 해당한다.[4] 중국(중국공산당)은 대만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려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존재감이 높아져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의 전통적 주장이 힘을 잃게 될 것을 우려했고, 중국의 TV에 청천백일만지홍기가 휘날리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국은 일차적으로 대만에서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면 전면적으로 보이콧을 할 것을 시사하여 국제적인 외교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가오슝이 내건 금전 공약은 제법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실제 투표로 들어가면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예측이 적지 않았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을 통해서 엽기적인 제안을 내걸었다. 거수 표결, 쉽게 말해 공개 투표로 개최지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아시안 게임의 보이콧도 불사하는 중국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거수 투표가 되면 어느 나라가 중국에 반대를 하는지 노출되며, 중국에게 정치적 보복을 당할 여지도 상당했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국가는 어쩔 수 없이 부산을 찍어야 했다. 결국 1995년 5월 22일에 거수 투표가 강행되었고 개최지 투표에 참가한 41개국 중에 37개국의 지지를 얻은 대한민국의 부산은 2002 아시안 게임 개최지로 확정되었다.
상단의 사진은 부산이 2002 아시안 게임 유치도시로 결정된 이후, 주 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에 들이닥친 대만인들의 모습이다. 거수 투표로 개최지를 결정하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 당연히 대만은 노발대발하면서 반발했지만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5]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자진 포기를 권유했고, OCA 위원장도 대만의 자진 포기를 권유했다. 결국 부산은 이렇게 가오슝을 제치고 21세기 최초의 아시안 게임 유치에 성공했다.
물론 부산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중국과 대만의 갈등 속에 어부지리로 유치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부산 아시안 게임 유치 성공에는 대한민국 유치위의 열성적인 노력도 있었다. 당시 아시안 게임 개최지 선정 장소는 한국의 롯데호텔 서울이었는데, 한국에서 개최지 선정이 이루어지도록 이끈 것도 유치위의 공로였다.
3. 주제곡[편집]
4. 역대 조직위원장[편집]
5. 정식 종목 및 경기장[편집]
총 38개 종목이 치뤄졌다.
- 개폐회식: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7]
- 육상: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 마라톤 코스, 경보 코스
- 수영: 사직 수영장, 창원실내수영장(수구)
- 양궁: 강서양궁경기장
- 배드민턴: 강서체육관
- 야구: 사직 야구장
- 농구: 금정체육관, 사직실내체육관(4강전, 결승전)
- 당구: 동주대학교 체육관
- 보디빌딩: 부산시민회관
- 볼링: 홈플러스 아시아드볼링장
- 복싱: 마산실내체육관
- 카누: 서낙동강 조정카누 경기장
- 사이클: 금정밸로드롬, 기장산악자전거경기장(MTB), 도로 코스
- 승마: 부산경남경마공원
- 펜싱: 강서체육관
- 축구: 구덕운동장[8] , 울산 문수 축구경기장, 창원종합운동장, 마산종합운동장, 양산종합운동장
- 골프: 아시아드 C.C.
- 체조: 부산사직체육관
- 핸드볼: 창원실내체육관
- 하키: 강서하키경기장
- 유도: 구덕체육관
- 카바디: 동명정보대학교
- 가라테: 양산대학(현 동원과학기술대학교) 체육관
- 근대 5종: 사직수영장(수영), 창원종합사격장(사격), 부산경남경마공원(승마), 창원 늘푸른전당(펜싱), 삼락강변체육공원(크로스컨트리)
- 조정: 서낙동강 조정카누 경기장
- 럭비: 울산공설운동장
- 요트: 수영만 요트 경기장[9]
- 세팍타크로: 동서대학교 민석스포츠센터
- 사격: 창원종합사격장
- 소프트볼: 구덕야구장
- 정구: 사직정구장
- 스쿼시: 양산대학(현 동원과학기술대학교) 체육관
- 탁구: 울산동천체육관
- 태권도: 구덕체육관
- 테니스: 금정테니스경기장
- 배구: 기장체육관, 해운대해수욕장(비치발리볼)
- 역도: 부경대학교 체육관
- 레슬링: 양산실내체육관
- 우슈: 동서대학교 민석스포츠센터
5.1. 따로 문서가 개설된 종목[편집]
6. 마스코트[편집]
2002년 아시안 게임의 공식 마스코트는 부산광역시의 시조(市鳥)인 갈매기를 디자인한 두리아이다. 두리아에는 영원한 아시아(Durative+Asia)라는 뜻의 복합어, “둘이(두리) 함께”라는 의미도 있다. 갈매기는 부산시의 새이기도 하며, 역동적이고 순수한 것을 상징한다.
7. 메달 순위[편집]
7.1. 대한민국 메달 현황[편집]
7.1.1. 세부 종목 메달 현황[편집]
7.1.1.1. 금메달[편집]
7.1.1.2. 은메달[편집]
7.1.1.3. 동메달[편집]
8. 한국 측 스폰서[편집]
9. 기타[편집]
- 성화는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에서 채화되어 임진각에서 합화되었다. 성화의 최종점화도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남한의 하형주 선수와 북한의 계순희 선수가 공동 점화했다. 북한 성화 봉송자들이 채화하고 금강산에서 만나 남한에 인계했다. 개최 몇달 전 제2연평해전 등의 악재가 있었으나, 여전히 활발히 진행되던 햇볕정책을 위시한 남북관계 개선사업에 기인해 가능했던 것.
- 이 때까지만 해도 생존해 있던 대한민국 스포츠의 영웅이자 원로인 손기정 선생이 점화자로 검토되기도 했는데, 이미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던 터라 점화자로 발탁되지 못했다. 그래도 2002 아시안 게임을 끝까지 보고 사망하였다.
- 선수들의 숙소를 해결하기 위해 반여동에 해운대 아시아선수촌이라는 대단지 아파트를 지었다. 숙소로 사용한 뒤에는 일반인들에게 분양되었다. 2,290세대로 반여동에서 제일 큰 아파트단지이기도 하다.
- 북한이 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열린 스포츠 대회에 참가한 대회이기도 하다. 북한은 그 동안 1988 서울 올림픽에 불참한 것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에서 열린 수많은 스포츠 대회에 전부 불참했으나, 이 대회에 사상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한 것. 대한민국에서 인공기 게양과 북한 애국가 연주를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인공기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 게양되고 북한 국가가 처음으로 정식 연주되었다.[12][13]
- 북한은 선수단 외에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응원단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미녀 응원단'이란 별명이 붙어 당시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선수들의 참가와 공식적인 자리의 인공기 게양 같은 것보다는 이 응원단이 더 많은 관심을 끄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미녀 응원단으로 불렸던 이 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관중을 불러모았다. 그 외에도 북한은 스스로를 '북한'이 아닌 '조선'으로 일컫기 때문에 북한 응원단을 환영한다는 플랜카드에 있는 '북한'이란 문구를 보고 항의해서 철거하는 일도 있었다.
- 대만이 개회식 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게 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부산광역시 관계자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시안 게임에서도 올림픽처럼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걸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 결국 올림픽에서 그렇듯 중화 타이베이의 깃발인 매화기를 달아야 했다.
- 남자 농구 대표팀이 중국을 102:100으로 이기고 20년 만에 AG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판정 논란이 있긴 했지만, 국내 농구 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영광의 순간이다.
- 이 대회의 공식 음악은 양방언이 작곡한 Frontier라는 곡이다. 원래 이 곡은 2001년에 발매된 Pan-O-Rama라는 이름의 앨범에 수록되어 있던 퓨전 국악곡이었는데, 부산 아시안 게임 관계자가 우연히 이 곡을 듣고 공식 음악으로 선택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 곡이 흥해서 현재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다.
- 축구의 경우 몇 달 전에 치러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4강 신화에 힘입어 16년 만의 금메달을 노렸으나, 4강전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패해 3위 결정전으로 밀려나 동메달로 만족해야 했다. 승부차기 때 이영표가 날린 슛이 골대를 맞는 바람에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는데, 세간에서는 이 골을 보고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 슛이라는 별칭이 붙어졌고, 실제로 이동국은 바로 다음해인 2003년부터 광주 상무에 입대하여 병역 의무를 수행했다.[14] 이 사건은 대한민국 축구의 열기를 불과 100여 일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러뜨린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대회를 통해 지도자 첫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박항서는 우승 실패를 이유로 부임 석 달 만에 전격 해임되는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15] 이 때 이란 대표팀은 자바드 네쿠남, 알리 다에이, 골모함마디, 바헤디, 카에비, 알리레자, 에브라힘 등 전력이 상당했다. 특히 와일드카드로 공격수와 골키퍼를 뽑는 등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에 상당히 전력이 강했다.
- 부산 도시철도 3호선은 원래는 아시안 게임 개최에 맞춰 개통할 계획이었다. 주경기장 바로 옆을 종합운동장역이 지나가도록 지어지기도 했고, 노선에 아시아드선이라는 애칭을 붙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와 계획 변경[16] 등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가 늦어져서, 실제 개통은 아시안게임이 끝나고도 3년이나 더 지나서야 가능했다. 그래도 아시안 게임 기간 동안 원활한 교통 흐름을 대비하기 위해서 미남역~거제역 구간의 경우 토목공사에 한해서는 예정대로 진행하였다.[17][18][19]
- 부산 아시안 게임의 경기 진행 장소를 보면 창원시, 양산시, 마산시, 울산광역시 등 모두 그 당시 영남권에서 중소~대도시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양산시의 경우 본 아시안 게임을 대비해 양산종합운동장이 계획,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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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분산 개최.[2] 큰 스포츠 국제 대회를 치를 여력이 되는 아시아 국가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3]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을 유치했던 대한민국의 인천 또한 이러한 이유로 상당한 빚을 떠안았지만 인천의 경우 4년만에 빚을 모두 갚으며 국제 대회 유치의 후유증을 비교적 빠르게 털어냈다.[4] 일부 대만인들은 원래 같은 나라였다는 부분도 부정하기도 하지만, 대만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여전히 중국과 대만은 분단국가라는 것이다.[5] 공교롭게도 사마란치는 1988 서울 올림픽 유치를 승인해준 인물이기도 하다.[6] 전 부산광역시교육감,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교육감 재임 시절에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중, 고등학교인 부산국제중학교와 부산국제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교육감 퇴임 후 부산국제외국어고등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교장을 지냈다.[7]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개최지[8]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축구 경기 일부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9]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요트 경기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10] 라빌 나차에프(우즈베키스탄)와 공동우승[11] 김인섭의 동생이다.[12] 대한민국이 먼저 여유를 보여줌에 따라서 이후 북한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도 태극기 게양와 애국가 연주가 뒤늦게 허용되었다.[13] 사실 국제스포츠대회는 국제스포츠단체가 주관하기 때문에 원래 국제대회 원칙에 따라야 한다.[14] 이동국 외에도 김용대, 김영철 등이 이 경기의 패배로 인해 병역 특례에 실패했지만, 아무래도 네임밸류가 높은 이동국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15] 이 때의 자세한 정황은 박항서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16] 미남역 - 안평역 구간을 지선으로 하려던 것을 경전철로 바꾸면서 4호선으로 분리된 것 등.[17] 그 증거로 해당 구간의 역사 출입구와 환풍구 디자인을 들 수 있다. 출입구의 경우, 다른 구간에 속한 역사의 그것과는 다르게 전체적인 형태는 2호선 2단계 구간과 거의 같고 마감재를 검정색 화강암으로 마무리 하는 등의 차이를 보여주었고 난간 장식도 부산 아시안 게임 공식로고를 금색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풍구도 2호선 2단계 구간의 그것과 형상이 거의 유사하고 측면에 장식을 놓고 상부 마감은 검정색 화강암으로 마무리 하였다.[18] 다만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한 것은 종합운동장역 5번, 7번, 9번, 11번 출구를 제외하고 대회 이후 2005년에 마무리 공사 동안에 설치하였다.[19] 앞서 언급한 해당 번호의 출입구는 미남~거제역간 출입구 중에서 가장 먼저 2001년에 완공되었고 외부 마감조차도 2호선 출입구랑 완전히 똑같은 형태이다. 게다가 이 출입구는 3호선 개통 이전까지는 지하도 출입구로 임시로 활용한 전적이 있다. 다만 5번, 7번 출입구는 이후에 에스컬레이터 설치 공사로 인해 철거하고 다시 만든 전적이 있다.[20]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된 한글날이 공휴일로 다시 지정된 것은 2013년부터.